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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덕후들을 위한 베트남 커피의 모든 것 ( 역사, 맛, 향미 )

by i237tour 2025. 10. 8.

베트남은 커피를 단순한 음료가 아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나라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도입된 커피는 이후 베트남인의 입맛과 문화 속에 완전히 스며들며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강렬한 로부스타 원두의 향, 천천히 떨어지는 핀(Phin) 필터의 물방울, 그리고 달콤한 연유의 조화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혹적인 조합이다. 커피덕후라면 반드시 한 번쯤 베트남 커피의 세계에 빠져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베트남 커피의 역사적 배경, 진한 맛의 비밀, 그리고 지역별 향미의 다양성을 중심으로 그 매력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로스팅 된 커피 원두
로스팅 된 커피 원두

베트남 커피의 역사 – 식민지의 흔적이 만든 새로운 커피 제국

베트남 커피의 뿌리는 185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앙고원지대에 커피 묘목을 심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는 자국 내에서 소비할 커피를 식민지에서 확보하고자 했고, 베트남의 다락(Da Lat)과 닥락(Dak Lak) 지역이 그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초기 재배는 쉽지 않았다. 열대성 기후로 인해 병충해가 많았고, 인프라가 부족해 생산량은 미미했다. 이후 20세기 중반, 정부의 농업개혁과 관개 기술의 발전으로 커피 재배는 본격적인 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80년대 ‘도이머이(Doi Moi, 개혁개방 정책)’가 시행되면서 커피는 베트남의 대표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베트남은 세계 커피 생산량의 약 15~20%를 차지하며,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 커피 수출국이다. 흥미로운 점은 베트남이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로부스타(Robusta) 품종을 주로 재배한다는 것이다. 로부스타는 고산지대보다는 저지대에서 잘 자라며,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다. 반면 아라비카(Arabica)는 섬세한 향과 산미가 있지만 재배가 까다롭다. 베트남은 실용적인 선택을 통해 ‘양’에서 ‘질’을 만들어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식 커피 문화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했다. 프랑스의 드립 커피가 ‘핀(Phin)’이라는 금속 필터를 통해 현지화되었고, 진하고 쓴 로부스타 커피에 연유(Condensed Milk)를 넣는 독창적인 방식이 탄생했다. 하노이의 거리 카페에서는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며 신문을 읽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커피 한 방울 한 방울을 기다리는 그 여유는, 베트남인들이 커피를 ‘속도의 시대 속 쉼표’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트남 커피의 맛 – 강렬함, 단맛, 그리고 밸런스의 예술

베트남 커피는 흔히 ‘진한 쓴맛 속의 단맛’으로 표현된다. 이는 로부스타 원두의 강한 캐릭터 덕분이다. 로부스타에는 아라비카보다 카페인이 약 두 배 많고, 특유의 흙내음과 견과류 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이 강렬한 맛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연유를 사용한다. 이때 사용되는 연유는 일반 우유보다 훨씬 농축되어 있으며, 단맛이 깊고 밀도감이 있다. 커피와 만나면 단맛과 쓴맛이 균형을 이루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대표적인 메뉴는 ‘카페 쓰어 다(Cà phê sữa đá)’다. 진한 로부스타 원두를 핀 필터로 천천히 내린 뒤, 연유와 얼음을 섞어 시원하게 즐긴다. 이 커피는 더운 날씨에도 진한 커피향을 유지하면서도 달콤한 청량감을 주는 음료로,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다른 베트남 커피의 대표주자는 ‘에그커피(Cà phê trứng)’이다. 하노이의 카페 지앙(Café Giảng)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커피는 달걀노른자, 설탕, 연유를 섞어 크리미한 거품을 만든 뒤, 뜨거운 커피 위에 얹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디저트 같지만, 한입 마시면 진한 커피향과 달걀의 부드러움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최근에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와 결합한 다양한 메뉴가 등장하고 있다.

베트남 커피의 향미 – 토양, 기후, 로스팅이 빚어낸 복합적 풍미

베트남 커피의 풍미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르다. 가장 유명한 산지는 다락(Da Lat), 닥락(Dak Lak), 람동(Lam Dong), 지아라이(Gia Lai) 등 중부 고원지대다. 이 지역들은 해발 800~1500m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한 기후 덕분에 원두가 천천히 자라 향이 깊다.

다락 지역 커피는 과일향과 초콜릿 향이 조화로운 고급 커피로 평가받으며, 닥락 지역 커피는 흙내음과 견과류 향이 강해 묵직한 바디감을 가진다. 람동 커피는 부드럽고 밸런스가 뛰어나 블렌딩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베트남에서는 ‘내추럴(드라이) 프로세싱’을 주로 사용하여 커피 체리의 과육을 제거하지 않고 햇볕에 그대로 말린다. 그 결과 초콜릿, 카라멜, 견과류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버터, 설탕, 코코아 등을 함께 볶는 전통 로스팅 방식은 독특한 달콤함과 깊이를 더한다. 이러한 베트남식 로스팅은 현대 스페셜티 커피와는 다른 감성을 전달하며, 현지 커피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최근에는 싱글 오리진 로부스타(Single-Origin Robusta) 브랜드가 등장하며, 베트남 커피가 단순히 ‘강한 커피’가 아닌 ‘섬세하고 품질 높은 커피’로 재평가받고 있다.

 

베트남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기후,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시작된 커피문화가 베트남인의 손끝에서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얻었다. 핀 필터로 천천히 내린 커피는 단순한 카페인 공급원이 아니라 기다림과 여유의 상징이 되었다. 하노이의 오래된 카페에서 한 잔의 뜨거운 ‘Cà phê sữa nóng’을 마시며, 커피 향에 섞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라.